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렌드라 모디 (문단 편집) === 구자라트 주 총리 === 모디는 1998년 구자라트 주 총선에서 탁월한 선거 전략으로 케슈바이 파텔을 주 총리로 당선시키며 [[인도 인민당]]의 총서기(중앙당 사무총장)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파텔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2001년 지진이 일어나 민심이 악화되어 재보궐선거에서 인도 인민당이 일부 패배하자 신인을 등장시켜야할 필요성을 느낀 인도 인민당이 나렌드라 모디를 새 얼굴로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물론 인민당 내부에서도 아무 경험이 없는 모디에게 주 총리직을 맡기는 안에 대해 찬반논란이 많았다. 당대표였던 L. K. 아드바니와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역시 모디가 총리직을 맡기보다는 차라리 파텔을 도와 부총리직을 맡는 것을 선호했지만 모디가 '권한을 전적으로 일임하지 않으면 수락하지 않겠다'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구자라트 주 총리직을 맡기게 된다. 2001년 10월 7일부터 총리직에 취임한 모디는 2002년 2월 24일에는 총선에서 구자라트 주의회에 입성하는 데에도 연이어 성공한다. ||[[파일:1_16a081ebf90.1908219_2422110044_16a081ebf90_medium.jpg|height=300]]||[[파일:IndiaTvf8ba5d_Sharma-who-took44456.jpg|height=300]]|| ||2001년 주 총리 취임 ||2002년 구자라트 폭동 || 그가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은 2002년 2월 27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수백명의 힌두교도들이 타고 있던 열차가 화재로 불타 6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사건이 터진다. 모디는 이 사건이 무슬림이 방화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발표했고, 다음날 격분한 힌두교도들이 구자라트 주 전역에서 반-이슬람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부가 희생자들의 시신을 사건 현장에서 주도(州都)인 [[아마다바드]]로 옮겨온 것이 힌두교도들의 반이슬람 정서에 불을 붙였다. 구자라트 일대에서 힌두교도들의 대대적 폭동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정부 발표로는 790명의 무슬림들과 254명의 힌두교도들이 죽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조사도 있다. 이 구자라트 폭동은 1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라야했고 수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는 등 구자라트 일대의 치안이 붕괴한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구자라트를 총괄하던 모디는 이 사건에 대한 대처로 상당히 욕을 많이 먹었다. 정부의 대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폭동을 조기진압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심지어 모디가 폭동을 조장•방치했다는 의심의 눈초리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모디는 폭동 도중 거리에 경찰들을 배치하고 폭동 발생시 즉시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만 상황을 진정시키기는 무리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자라트 폭동 당시 모디의 대처는 두고두고 그가 정적들에게 비판받는 부분이다.] 2022년 당시 무슬림 가족을 습격 강간, 살해한 일당 11명이 가석방 되었고 이에 비난이 쇄도하는 중이다. 구자라트 주 폭동이 외신에까지 보도되며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자 당연히 모디 총리는 당장 사퇴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심지어 같은 인도 국민민주동맹[* National Democratic Alliance. 인도에서 주로 힌두정치,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당들이 연합한 정당 연합.] 내부에서도 그가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모디는 어쩔 수 없이 2002년 4월 인민당에 주 총리를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당에서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디는 구자라트 주지사 S. S. 반다리에게 사퇴의사를 밝힌 다음, 주의회를 해산하고 2002년 12월에 조기총선을 치러 재신임을 묻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야당 측에서는 유권자들의 명단 미비를 이유로 반대했지만 모디는 그냥 강행했다.] 결국 인도 인민당은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182석 중 127석을 거두는 압승을 거뒀고 2002년 12월 22일에 모디는 구자라트 주 총리로서 2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도 말이 많았다. 모디가 대놓고 반이슬람적인 캠페인을 펼쳐 종교적으로 양극화된 인도 사회의 불화를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비판이 많다.] 모디의 구자라트 2기 내각의 경우 [[힌두트바]] 등 종교적인 문제보다 경제적인 문제에 훨씬 더 관심을 쏟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디 총리는 구자라트 지방 내에서 힌두 우익 조직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시켰고, 힌두 조직인 고르단 자다피야를 내각에서 해임하는 등 종교적으로는 이전보다 훨씬 온건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구자라트 내 200여개에 달하는 불법적 힌두교 사원들을 강제로 밀어버렸고 힌두교 단체들과의 거리는 날로 멀어졌다. 그렇다고 그가 아예 힌두교 중심 정책을 포기했다는 건 아니다. 모디와 무슬림들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당시 인도 총리였던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총리마저도 북인도 지방의 무슬림 표심을 호소하는 유세에서 모디의 대 종교 정책이 실수라고 비판했고,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은 아예 그에게 종교탄압을 근거로 입국금지를 때려버렸다. 여전히 모디의 이슬람 정책이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부분. 그는 임기 기간 [[민영화]]와 작은 정부, 감세라는 경제 정책을 지향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수도시설이 미비한 구자라트에서 농지에 물 공급을 시키는 데 주력했는데, 이를 위해 50만 개에 달하는 구조물을 지었고 개중 11만 3천 개는 사방댐이었다. 사방댐을 지어놓은 덕에 [[지하수]] 수면이 상당히 올라오며 상황이 크게 개선됐고, 개선된 수도 공급을 기반으로 솜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인도 내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의 솜 산업계를 구축했다. 덕분에 2001년부터 2010년까지 구자라트 지방의 농업 성장률은 전국에서 제일 높은 10%대를 기록했고 구자라트의 경제 성장률 역시 평균 10%를 넘나들면서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그의 경제적 성과 덕분에 구자라트는 인도에서 가장 사업하기 편한 지방으로 떠올랐고 특별경제구역까지 만들어지면서 경제적인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농업용 전력과 일반 전력을 분리해 지방의 전력 공급을 안정화하기도 했다. 그렇게 경제성장으로도 상당한 지지세를 얻은 모디는 2012년 총선에서 182석 중 115석을 얻어내며 구자라트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모디 주 총리의 행적에도 의문이 가는 점은 많다. 그가 대표적인 업적으로 내세우는 평균 10%대 성장률은 인도의 다른 고도로 산업화된 주들에서도 나름 흔하게 나타나는 성장률이고, 결정적으로 90년대 [[인도 국민회의]] 치하에서 구자라트 주의 평균 성장률은 13%대였다. 10% 대에 달하는 큰 성장률이 단순히 모디 총리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게다가 높은 성장률에 비해 빈곤율이나 빈부격차, [[인간개발지수]] 등 복지와 관련된 지수는 별다른 개선을 보이지 않았다. 모디 총리의 재임 기간 동안 5세 미만 아이들 중 45%가 저체중이었고 23%가 영양실조에 걸려있다는 심각한 조사가 나오기까지 했고, 빈곤율과 여성 문해율 측면에서도 인도 내부에서조차 하위권을 연달아 차지하는 불명예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정부의 간섭이 줄어 노동권은 나날로 악화했다. 경제성장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냐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주로 혜택은 도시와 중산층에 집중됐고, 농촌이나 빈민들의 생활은 더 나빠지거나 하락했다는 평이 주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